시향

익숙해진다는 것

산 야 로 2010. 9. 24. 19:08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가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사람들은 새것을 찾아 난리법석을 부리지만,

익숙한 것들에 늘 기대어 산다.

처음 산 구두를 반기는 것은 내 발가락이 아니라 내 머리일 것이다.

구관이 명관인 것은 새 구두가 발가락에 물집을 만든 뒤에야 알게 되지만,

좋은 구두를 보면 견물생심의 욕구가 다시 생겨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익숙함에 맞춰져 있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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