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막강한 지원을 바탕으로 1985년 팝계에 모습을 드러낸 휘트니 휴스턴의 1집은
'대박'이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의 엄청난 히트를 쳤다.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1집 "Whitney Houston"은
미국 내에서만 1300만장, 세계적으로 2천 3백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는 역대 여가수 데뷔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려나간 앨범으로 기록됐다.
"보컬이 너무 신인답지 않아서 신선하지 않다"는
칭찬 아닌 칭찬까지 들을 정도로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는
같은 흑인들 뿐 아니라 백인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호소력 짙은 흑인 음악 특유의 소울과 가스펠로 다져진 다부진 목소리,
시원한 보컬과 정교한 감정처리로
팝 발라드를 누구보다 웅장하게 소화한 그녀를
미국인들은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모두 휘트니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1집의 대성공 이 후,
2년만에 발매된 휘트니 휴스턴의 2집 "Whitnet"는
여성 최초로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했고
미국내에서 900만장, 전 세계적으로 2000만장이 팔리는
폭발적인 흥행력을 과시했다.
무려 11주동안 차트 1위를 고수했고,
85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던 그녀의 2집은
1집의 결과물을 뛰어 넘는 음악적 완성도와 천문학적 수익으로
휘트니 휴스턴을 명실공히 팝계의 여왕으로 등극시켰다.
"다이애나 로스, 아레사 프랭클린도
휘트니 보다는 위대하지 않다"는
찬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80년대 팝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휘트니 휴스턴은
90년대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는 인기 행진을 지속했다.
1990년 발표했던 3집은 그동안 추구했던 알앤비 뿐 아니라
소울, 댄스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키는 실험적 앨범으로
데뷔 6년차 휘트니 휴스턴의 관록을 보여줬고
전 세계적으로 1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메가 히트를 쳤다.
3집에 이르러 휘트니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더욱 후해졌고,
대중의 충성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2년, 휘트니 휴스턴은
영화 [보디가드]에서 케빈 코스트너와 호흡을 맞춰
주연을 활약했을 뿐 아니라 영화 주제곡을 부르며 또 한번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대 가장 유명한 영화 음악인 "I will always Love You"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운드로 전무후무한 히트를 쳤다.
이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4주간 1위를 기록했고,
OST 앨범은 전 세계에서 발매된 OST 앨범 중
역대 최다 판매고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 앨범은 19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그녀의 뛰어난 음악성은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 6차례 수상에서도 증명된다.
1986년과 1988년, 1994년까지 세 차례나
'최우수 팝 여성 보컬상'을 받은 그녀는
2000년에는 '최우수 알앤비(R & B) 여성 보컬상'을 받았다.
나머지 두 개가 바로 1994년 [보디가드] 앨범으로 받은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앨범' 상이다.
그녀는 사망 전까지 6개의 정규 앨범과
3개의 사운드 트랙을 발표했는데
이 음반 모두 다이아몬드, 멀티 플래티넘, 플래티넘, 골드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 뒤에는 불행의 그림자게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바로 1992년, '팝계의 악동'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이 그 불행의 단초였다.
영화 [보디가드]로 전 세계적 명성을 자랑한 그 시절,
그녀는 주위의 만류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휘트니 휴스턴은 하루 빨리 안정된 가정을 얻길 원했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평범한 행복을 꿈꿨다.
하지만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휘트니 휴스턴 인생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바비 브라운은 휘트니 휴스턴과 결혼할 당시부터
헐리우드의 유명한 마리화나 중독자였다.
그는 툭하면 휘트니에게 폭언과 욕설을 해댔으며,
결혼 1년 뒤부터는 폭력까지 휘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비 브라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휘트니는
그와의 사이에서 딸 바비 크리스티나를 낳았지만 변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비 브라운은 여전히 폭력을 휘둘렀으며,
휘트니와 크리스티나에게 욕설을 해댔다.
여성으로서 평범한 행복을 기대했던 그녀에게
바비 브라운의 가정폭력은 이겨낼 수 없는 힘든 짐이었다.
결국 휘트니 휴스턴은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깊게 빠져들었다.
남편을 따라 마약과 약물에 손을 댔으며, 심각한 정신 분열 증세에 시달렸다.
총기 있던 눈빛은 흐리멍텅해지기 시작했고,
탄력 있던 피부와 밝은 미소에는 씻어낼 수 없는 어둠이 짙게 내려 깔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트니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3집 발표 이 후, 8년만에 내놓은 휘트니 휴스턴의 4집은
국제적으로 1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그녀의 이름값을 증명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휘트니 휴스턴은 2001년, 아리스타와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재계약에 성공한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1998년 4집 앨범을 끝으로 휘트니 휴스턴은 끊임없는 몰락의 길에 빠져들었다.
2002년 발매된 5집과 2003년 발매된 6집은 대중의 차가운 외면을 받았고
그녀는 더더욱 마약과 약물,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 브라운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얻어 맞았으며,
때때로 함께 마약을 하자고 강요 당하기도 했다.
더욱 불행한 것은 딸인 바비 크리스티나까지
어린 나이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비 브라운의 심각한 가정 폭력과 끊임없는 학대는
음악에 대한 휘트니 휴스턴의 열정마저 꺾어 버렸다.
누구보다 파워풀하고 뚝심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사라져버렸고,
팝계는 더 이상 휘트니 휴스턴의 것이 아니었다.
80~90년대를 관통했며 이뤄냈던 그 엄청난 업적들과
화려한 영광도 모두 과거의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할 의지도 잃어 버릴만큼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 환자일 뿐이었다.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던 휘트니 휴스턴이
간신히 바비 브라운과의 관계를 정리했던 때가 바로 2006년이었다.
1992년 결혼해 2006년 이혼하기까지.
그 14년의 '지옥' 같았던 결혼 생활은
휘트니 휴스턴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악몽이었다.
혹자는 바비와 빨리 헤어지지 못한 그녀를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만큼 그녀에게 바비와 이룬 가정은
지켜야 할 것, 지켜내야 할 것, 지켜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휘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가정조차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한 그녀는
그로부터 3년 뒤인 2009년 6집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알리샤 키스, 알 켈리 등 팝계 유수의 거물들이 참여한
그녀의 6집은 발매하자마자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첫 주에만 30만장이 팔려나가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마약과 술에 찌든 그녀의 목소리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고,
라이브 무대는 예상보다 훨씬 참혹한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호주 공연에서는 그녀의 노래에 실망한 관객들 절반이
공연 도중 항의를 하며 밖으로 나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끊임없는 마약과의 사투. 2009년 6집 발매 이 후,
가수로서 활동을 재기한 이후에도 그녀는 마약과 약물,
술과 담배를 벗어나지 못했고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다.
급기야 2012년에는 '파산설'까지 휩싸이며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을 감내해야했다
.
그녀는 누구보다 노래하고 싶어했고,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지만
현실은 그녀의 꿈과 이상을 따라와주지 못했다.